3월7일

기쁨과 은총의 대축제, 2000년 대희년

 화해는 회심에서 시작한다
루가복음의 '탕자의 비유'는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새로운 천년기를 준비하는 세 번째 해의 목표로 정하신 "고해성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욱 강도높은 거행"(제삼천년기 50항)의 필요성을 돋보이게 한다.

방탕한 아들의 모습에서 보듯이, 화해는 타락과 자기파괴의 생활로부터 생명과 선의 근원인 아버지께 돌아가는 회심에서 시작된다. 돌아가는 길에서 아들은 고백할 말을 연습하고 자신의 원을 이룰 방법을 모색한다. 예수님께서는 신적 자비를 깨닫게 하시고 또 인간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강조하시려고 이 비유로 말씀하셨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용서하려고 기다리고 계시지만, 또한 당신 자녀들이 서로 조화와 평화 안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큰아들이 책임있게 행동하고 충실하게 남아있었다는 것을 누구도 비판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방탕한 아들을 환영하지 않는 큰아들의 거부에 상심한다. 예수님께서 더 높은 기준을 세우셨다는 것은 명확하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한다"(마태 5,21-22).

고해성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한번 더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마태오복음은, 하느님과는 화해하나 이웃에게는 증오감과 원한을 품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

화해는 각자의 마음에서 시작되고 밖으로 동료 신앙인들에게 확장되며, 마침내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

2000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

 

 3월14일

기쁨과 은총의 대축제, 2000년 대희년

 뉘우침-고백-보속-용서
고해성사는 죄로부터 돌아서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회개의 성사이므로 종종 화해성사라고 불린다. 고해성사 예식에는 회개에 대하여 성서가 말하는 기본 요소들이 네 가지 행동에 포함되어 있다. 곧 저지른 죄에 대한 고해자의 뉘우침, 죄의 고백, 잘못한 것에 대한 보속의 약속, 죄의 용서이다. 고해성사 거행에는 세 가지 형식이 있는데, 개별고백, 공동체 안에서 개별적으로 고백하는 방법, 그리고 일반 사죄이다. 어떤 형식을 이용하든지 환영, 말씀의 전례, 고백, 사죄, 찬미의 선포, 그리고 폐회로 이루어진다. 고해성사의 이 세 가지 형식들은 모두 회개와 화해를 경축하며, 또한 전체 공동체의 신앙을 표현한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여러 고해자들이 고해하는 두 번째 형식은 개인적 회개와 생활개선의 필요를 보여주는 다른 형식들보다 죄의 사회적 측면과 성사의 공동체적 특성을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 고해성사는 즐거운 성사이다. 고해성사는 고해자와 하느님, 그리고 고해자와 공동체 사이의 새로워진 관계를 경축하기 때문이다.우리는 모두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 용서를 청하거나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는 성숙한 행동이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해진 손상을 너그럽게 보아주고, 상대방이 그렇게 할 마음이 없을 때라도 관계를 개선할 것을 요청하는 사랑의 최고행위이다. 상대방이 우리의 행동을 받아들이기 싫거나 받아들일 수 없을 때에는 화해가 이루어질 수 없다. 상처가 크거나 오래가는 것일 때에는 용서가 더욱 어렵다. 용서는 의지의 행위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함께라면 용서와 화해, 그 둘이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대희년을 준비하며-하느님 아버지] 참조 

2000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

 

 3월21일

기쁨과 은총의 대축제, 2000년 대희년

 회개 - 돌아서서 하느님께 향하는 것

  교회가 새로운 천년기를 경축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은 회개이다. '회개'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다시 생각함' 또는 '마음을 바꿈'이다.

  오늘의 세상에서는 자신의 잘못들을 쉽게 간과할 수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바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의 의무들, 가정에 대한 책임, 많은 계약들… 우리가 어떻게 살고있는지 생각해볼 시간조차 갖기 어렵다. 다른 한 가지는 현대사회가 인정하는 행동의 기준들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원칙들에 반대되지만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들을 매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덕의식이 점점 무디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예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의 삶을 살피게까지 되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한 방법이다.

  뉴욕의 시장이던 에드 코치는 매일 아침 지하철로 출근하며 "제가 시장 에드 코치입니다.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다고 한다. 우리의 삶을 살펴보기 위하여 시간을 내는 것, 그리고 규칙적으로 "예수님, 제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은 이 회심의 여정에서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좋으신 아버지, 은총의 때인 이 희년에 저희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소서. 아멘."

[대희년을 준비하며 - 하느님 아버지] 참조
2000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

 

 3월28일

기쁨과 은총의 대축제, 2000년 대희년

 회심

  
교황교서 [제삼천년기]에서 교황께서는 1999년의 '아버지께 나아가는 여정'을 '진정한 회심의 여정'이라고 말씀하신다. '진정한 회심'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황께서는 '죄로부터' 돌아서서 '선(善)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복음서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께서는 성령의 인도 아래 이루어지는 참된 회심의 세 가지 차원을 제시한다.

첫째, 우리의 시각이다. 진실한 회심은 우리의 실패와 한계와 죄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믿는 것을 내포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눈을 통해 삶을 바라보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둘째, 자기중심에서 신뢰로, 이기주의에서 모든 인간 존재와 하느님의 창조물들과 함께하는, 마음과 정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포함한다. 하느님, 그

리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핵심가치이며, 우리는 이 가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화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니 "나를 따라 오라"고 당신 제자들을 부르신다. 성령께서는 이 시대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이 시대와 환경에서 예수님과 똑같이 행동하도록 이끌고 계신다.  

2000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